엄기호쌤의 <단속사회와 정치의 불가능성> 강연 정리.
엄기호, <단속사회와 정치의 불가능성>
*두서없이 휘갈겨 메모했음. 틀리거나 빠진 부분 있음. 나름 재구성했음.
1)
-요즘 자신의 관심사는 학교, 교실, 아파트의 동 등등 자신의 생활공간 단위에서 문제 해결이 가능한가? 생활공간단위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문제해결에 의지가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요즘의 문제는 갈등이 토론과 해결이 아니라 폭로-매장으로만 진행되는 것.(정치권이나 sns논쟁을 살펴봐라) 과거의 폭로는 소수자들이 쓰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냉소적이 되었다.
2)
-(내가 만나는 교사들은 다들 의식있고 진보적인 교사들인데) 교사들이 의도적으로 안쓰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가르침’이다. 대신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배움’이다. 많은 교사들이 이 단어를 터부시한다. 이렇게 많이들 이야기한다.“아유 제가 뭘 가르치겠어요..” 그런데 교육은 ‘가르침’과 ‘배움’이 만나는 것이다. 가르침이 없는데 배움이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물론 ‘가르침’이란 단어가 한국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자기도 잘 안다.(좀 꼰대질을 할 때, ‘뭘 가르치려든다’고 하는 것처럼..) 지금은 가르침이 ‘단절’,‘실종’된 시대이다.
우린 스스로를 가르치는 자라고 포지셔닝 해야 한다. 스스로를 촉진자라고 하는 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닌가.
3)
현재 한국 학교에선 ‘질문’이 없다. 애들이 질문을 안 한다. 이게 질문할 가치가 있는지? 자문하고 쪽팔려한다.
우리 학교에선 아는 자만 질문을 한다. 내가 뭘 모르는지 아는 자만 질문을 한다. 소크라테스의 경지에 오른 이만 질문하는 셈. 질문의 의미를 배반하는 자(질문은 모르니까 하는 것이므로)들만 질문한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질문은 “샘,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이다.
일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 왈, 우리는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말하고 듣는’ 관계로 바꾼다. 원래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서로 ‘타자’이다.
철학에서의 타자는 의미가 공유되지 않는 존재이다. 고로 서로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하다. 가르침의 과제는 못 알아듣는 자에게 어떻게 알아듣게 할 것인가 이다.
수학을 예로 들자. 수학은 타자와 계속 친해지는 과정이다. 처음엔 자연수, 다음엔 음수, 무리수, 허수.. 등등. 한국에선 수학을 계산으로만 가르친다. 문제풀이로만 가르친다.
고진 왈, 가르침은 목숨을 건 도약이다. 두 외국인이 서로에게 외국어를 어떻게 가르치는가?
두가지 질문이 나온다. 학생을 타자(철학적인 의미의)로 생각하는가? / 학생은 그냥 진짜 타자(널부러진)인가?
<우리교육>에서 펴낸 <학교 안의 문맹자들>이란 책을 추천한다. 학교교육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학교의 언어 자체가 학생을 말과 말 아닌 것으로 ‘가르는’ 것 아닌가?
말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말의 귀족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공부못하는 애들의 말은 학교에서 말이 아니다.
우리가 ‘가르치는데’ 실패하는 것을, 내 권력으로 아이가 ‘듣게 하는데’에 실패한 걸로 바꾸고 있다. 가르침의 실패를 학생의 실패로 전가하고 있다.
맹자 왈, 군자 삼락중 하나는 천하의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라 했는데.. 인재는 원래 가르칠 필요가 없는 아이이다.
잠깐 여담으로.. 요즘엔 의대갈 성적의 아이를 사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자식 고생시키는게 싫어서.
학교에서 타자를 배제하면(나랑 무관한 걸로) 학교가 재미없을 수 밖에 없다.
‘네가 하나도 모르는구나. (교과서 한줄 한줄 보면서) 그래. 그 하나를 찾아보자’.. 이게 교육이다. 그 하나를 찾는게 출발이다.
대개 우리가 ‘타자’인 교사를 생각할 때 연상하는 건 폭력교사나 문제풀이만 하는 교사. 이는 철학적 의미의 타자가 아님. 왜? 예측가능하니까.(폭력교사가.. 갑자기 애를 패면, 학생들은 “아 오늘은 기분이 안좋구나”하고 앎)
-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를 고민하자. 말의 위계를 깨뜨리자. 나는 누구에게 교사일 것인가를 고민하자.
3)
자신에게 수업듣는 대학생 200여명에게 물었다. 기억나는 수업이 있냐고?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된 수업이 있냐고? 다들 평소엔 대답 잘하고 레포트 잘 쓰는 애들이다. 몇 명이나 답했을까? 놀라지 마시라. 딱 2명이었다.
2명이 대답했는데, 수업내용은 기억이 안난다고 했다. 다만 그 선생의 이야기가 신선했단 걸 기억한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길 해줬다. 그게 신세한탄이건.. 사회 이야기건.. 미적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건.. ‘아 이걸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구나’하는 신선함.
학생들에게 이 이야길 하니, 몇몇 학생들이 ‘나도 나도’ 하며 이야길 시작했다. 대부분은 전교조 샘이 교장과 싸운 이야기였다. 권위에 대들 수도 있다는걸 깨달았단다.
타자에게 낯선 이야길 들려주는 이야기꾼으로서의 교사. 모르는 걸 친숙한 형태로 이야기하는 사람.
모르는 걸 알게 해주는 데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우게. 이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론 우화를 통해. 비유로서의 가르침. 후자가 벤야민이 이야기한 것.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을 뱃사람 타입과 농사꾼 타입으로 나눴다.
우린 어떤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는가?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사람. 이는 뱃사람 타입(어디갔더니 뭐가 있고 말이야.. 등등) 농사꾼 타입은. 가장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걸 발견해내는 사람. 농사꾼은 매 구체적 상황이 새롭다.
자긴 시골출신이라 비가 올듯하면 비냄새? 공기냄새? 가 달라지는걸 느낀다. 이걸 말로표현하는게 예가 될까.
이 시대에 가르치는건 1) ‘타자’로서의 학생을 만날것인가? 2)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일 것인가?
한 선생이, 애들이 수업을 재미없어 해서 오늘의 유머를 외워서 간다고 한다. 그 선생에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그러지마세요. 그냥 제게 이 상황을 들려준걸 이야기하세요. 그럼 웃을거에요.
전제가 있다. 학생들이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걸 인정해야 한다.
4)
질문을 하자. 나는 내 수업시간의 학생들을 ‘평등’하게 보는가?
‘동등’과 ‘평등’은 다르다. 동등은 능력이 동일한 것. 당연히 능력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다. 평등은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공히 지니는 것. 평등해지면 가르침-배움의 관계가 우정의 관계가 된다.
아렌트 왈, 정치는 철저히 평등한 사람들끼리 하는 것.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정치에서 배재된다. 전제가 있다. 나의 말과 그의 말은 등가라는 것. 그래야 정치 및 우정의 관계가 가능해진다.
우정은 동일성과 다르다.
서로의 말을 들을 만 할 때, 모든 의견은 이견임을 알 때, 정치가 나타난다.
그런데 내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건 너무 리스크가 크다. 타인은 이를 공격으로 듣는다. 이것이 ‘단속사회’. 자신을 타자로 드러내는 걸 스스로 단속한다.
요즘 우리 사회는 생각의 차이를 취향의 차이로 환원한다. 모든걸 문화적인 걸로 바꿔서 정치를 불가능하게 한다. 문제해결을 안하려 한다. 정치는 없고 정치적인 것(폭로)만 남았다..
우리사회는 종로(기업,증권가)에서 멘붕하고 한강(점집)에서 힐링하는 사회이다. 정치로 해결을 못하니 산업(각종 상담, 멘토들..)으로 힐링한다.
5)
강연을 마무리 지으면. 꼭 대안이 뭐냐고 묻는다. 내가 미리 봉쇄하겠다.
아렌트 왈. 우정의 대화가 반드시 결과를 낳을 필요는 없다. 공적인 이슈로서 내 이야기가 충분히 경청되고 검토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대안을 찾으려는 이유는, 내 삶에서 그게 없어서 관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찾으려는게 아니라, 그 관계의 단속을 직시하지 않으려 하는 의도가 아닌가.
--이하는 질문의 답변(질문은 뭔지 잘 기억안남)
-지그문트 바우먼 왈, 우리는 교육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시대의 교육을 완벽히 대체한 것이 상담이다. 상담은 주어가 ‘나’이다. 그런데 교육은 나의 고민이 우리의 고민이 되는 것이다. 교육은 보편을 지향한다.
우리의 고민을 사회적 고민으로 나누는 공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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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인간관계는 폭력적이다. 그것이 감당할 수 있는 폭력이냐 그렇지 않은 폭력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이 관계를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게 히키코모리이다.
커뮤니케이션이 폭력일 수 있는걸 알면 조심스럽게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할 수 있다. 진짜 폭력적인 사람은 그걸 모르는 사람. 너무 격의없이 대하는 사람도 더 폭력적일 수 있다. 상대가 맞춰져야하니까.
-조직, 교실, 학급, 학교가 가진 역량은 문제를 안 일으키는게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우린 폭력으로 해결하려한다. 많은 경우 상대의 사과가 아닌 항복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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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말해봣자 해결도 안 될거고.. 예전보다 요즘은 더 다이나믹하게 말해야 움직일둥 말뚱한다. 말을 하려고 하는 자도 배제가 된다. 단속사회. 왜 상대를을 동료로 삼지 않는가. 너무 힘드니까. 차라리 말을 안하게 된다.. 말해봤자 내 소리가 새롭게 들리지도 않고, 문제해결을 할 것도 아니고. 이걸 다 아니까 말을 안하는 것.
문제의 구조는 다 안다. 그러나 우린 그 사람의 ‘결’까진 모른다. 그 삶의 ‘결을 읽어야 말 걸기가 가능해진다. 구조를 흔들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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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때는 권력은 말하고 우린 들어야 했다. 이젠 말하는 자는 권력이 없는 자다.(철탑시위하는 노동자들..) 권력자들은 안 듣는다. 듣는 척을 하며 안 듣는다. 말해라 말해라 하지만..
결국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바틀비식 해결책(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유래. “나는 아무것도 안하겠다.”라는 태도로 저항)..은 결국 냉소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