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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교육공동체 벗에서 마련한, 엄기호교수님이 이끌어주신 "고통에 말걸기"라는 주제의 공부가 있었다. 많은 화두를 남겼고, 계속해서 머리 한 곳에 남아 아이들과의 만남을 고민하게 만든다.
고통의 종류.
고통은 여러가지다. 말하지 않는 고통, 말할 수 없는 고통, 말해서 생긴 고통이 있다.(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글이라 한 종류를 더 이야기 하셨던 것같기도..)
말하지 않는 고통은 그냥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사그라 들 수 있다. 말할 상대(=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상대)가 존재하고, 단지 내 앞에 부재할 뿐이다. 그래서 표현 안한 고통인 셈이기도 하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말을 전할 상대, 그러니까 말을 건네서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상대라는 존재 자체의 부재다. 내 고통의 정도, 상태를 그래도 내 말에 관심있는 상대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는 언어의 부재다. "엄청 아파" "굉장히 힘들어"라고 표현하기에는 나의 힘듦, 고민, 통증이 다 표현되지 않아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인 셈이다.
말해서 생긴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상대들이 들을 만한 언어에 나의 고통을 우겨넣으며 생긴 고통이다. 애초에 상대에게 내 고통을 말할 수 없는데, 말을 해야하니 어쩔 수 없이 상대들이 이해할(이해해줄)만한 언어로 표현해야한다. 고통이라는 무형의 덩어리를 언어라는 것으로 정제하며 생긴, 표현해서 생긴 고통이다.
아이들을 만나며...
엄기호교수님의 공부중독을 펴내면서 한 북콘서트에서 "배움은 두 가지다. 가르쳐 줘야만 배울 수 있는 것과 가르쳐 줄 순 없으나 배워야 하는 것(삶을 통해 배워나가는 것)"라고 한 것도 참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가르쳐 줄 순 없으나 배워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 혹은 "가르쳐서 가르쳐지지 않는 걸 가르치는 일"이라고 특수교사를 설명하곤 한다. 이런 설명을 이해하려면, 일단 특수교사가 엄기호교수님이 말한 두 가지를 모두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에 동의를 해야한다. 배움의 두 가지 중 전자를 "1,2,3 혹은 ㄱ,ㄴ,ㄷ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본다면, 후자는 "화장실 가고 싶을 때 화장실 가기를 가르치는 일"로 볼 수 있다. 특수교육 대상자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면, 아니 범위를 넓히지 말고 우리반 아이들 중 한 녀석으로 좁힌다면 이렇다.
"Y는 겹받침이 있는 글자가 들어간 표현을 말로 할 줄은 알지만, 맞춤법이 틀릴 때가 있다. 그래서 넓다, 싫다, 끓다, 삶다, 않다. 등의 표현을 쓴 말들을 쓰면서 배운다. 동시에 타인의 말에 귀기울여 듣고 기억하기를 배운다. 수업에서는 관심을 유도하고, 중간중간 들은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며, 지금은 누구의 이야기를 들을 때라는 걸 반복해서 이야기를 한다. 무슨 활동을 하건 간에..."
만남을 수업이라 이름 붙이기...
수업이라는 게 일반교육에서 행해지는 형태, 내용, 방법, 기술들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특수교육 대상자들의 특성상 가르쳐 줘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은 굉장히 많다. 가르쳐 줄 순 없으나 배워야 하는 것의 범위는 더 넓고 더 많다. 각각의 장애로 인한 특성들로 학생간의 편차, 학생 내의 편차로 인해 한 가지라고 해도 학생들 개별적으로 또 달라져서 스펙트럼이 생긴다. 이런 요소들이 있는 가운데 아이들을 만난다. 만남이 만남일 수 있을까? 그 만남을 수업이라 이름 붙이는 게 가능은 할까? 그래도 교과서가 있지 않냐며... 전자와 후자를 모두 그래도 교과서는 하지 않았냐며 자위하는 것은... 또 어떨까?
수업으로 말 걸기.
엄기호교수님의 강연들에서 남긴 화두 중, "'교사-학생'이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 이전에 '말하고 듣는 관계'는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보편적인 초중고의 학교, 학급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관계들에도 각각 해당이 될 의문인데, 저 의문은 내게 참 큰 과제로 남았다. 일반인들은 각기 자라온 배경, 관심분야, 기질 등등으로 다양한 언어적 환경을 가진다. 다양한 환경을 가지면서도 공유하는 영역이 있고 그래서 상호소통이 되며 새로운 환경에 대한 탐구가 일어나기도 한다. 특수교육 대상자들은 그런 언어적 환경의 차이점에 덧붙여 각기 다른 장애로 인한 요소, 언어발달, 청능, 주의집중, 타인에 대한 말 이해도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수업주제에 대한 스펙트럼 외에도 각기 다른 아이들에 대한 나의 언어사용에도 스펙트럼이 생긴다. 이 두 스펙트럼이 각기 다르게 펼쳐지려면 매 순간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의 시도를 통한 겪음이 일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 안에서 뱅뱅 돌다 그치고, 만남도, 만남을 통한 수업도, 수업을 통한 말걸기도... 그저 요원해질 수 밖에...
그래서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나의 벽을 넘고, 너의 벽을 넘어서, 너를 만나고, 함께 배우기 위해... 이 긴 생각타래를 짊어지고,,, 오늘을 살고 있다.
이 역시도 정리되지 않은 글로 남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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